이창섭(李昌燮) 선생. 한 때 공주교육대학의 국어과 교수를 지냈던 분이다. 그 뒤에 공주사범대학으로 옮겨가 교수로 있다가 신병을 얻어 이른 나이, 53세로 세상을 뜬 분이다. 나하고는 10여년 연상쯤 되는 분이지만 어떤 인연으로든(사제, 동문, 동향, 동직원) 관계를 맺지 않은 분이다. 다만 내가 충남지역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으므로 70년대 이후, 몇 차
공주지역에 살면서 바깥출입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화영 학장님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화영 학장님은 오늘날 공주대학교가 종합대학이 되기 바로 직전 공주사범대학의 마지막 학장으로 계셨던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를 떠나서도 즐겨 그분을 학장님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애칭인 셈이다. 이화영 학장님은 일찍이 이름난 수학 교육자였으며 그 이후로는
1. 선생과의 인연내가 공주문화원장의 일을 맡게 된 것은 지난해 7월부터다.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해준 분 가운데 한 분이 아마도 대전의 임강빈 선생이실 것이다. 그래 그러셨을까. 그 사이 여러 차례 문화원으로 나를 찾아 오셨었다. 별다른 볼일이 있어서 오시는 건 아니었다. 공주에 문득 오고 싶어서 오시고, 누군가 한 사람 만날 사람이 있어서 오신 길에 들
인간은 자연의 아들인간은 언제든지 홀로 인간일 수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과 더불어 인간이고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다. 그건 시공을 떠나 변함이 없는 일로서 인간으로선 커다란 축복인 동시에 하나의 굴레이기도 하다. 한국의 독특한 의식구조 가운데 하나인 혈연이나 지연, 학연과 같은 것들도 이런 인식과 습속의 범주 안에서 논의되는 항목들이다.그런 의미에서
지난 2009년 초여름, 줄장미와 창포꽃이 필 무렵, 같은 교회(공주중앙장로교회)에 다니는 최범수 장로한테서 전화가 왔다. 함께 갈 곳이 있다는 얘기였다. 약속된 장소에 나가보니 또 한분의 동행인이 있었다. 역시 같은 교회에 다니는 이용주 장로였다. 우리는 셋이서 최범수 장로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이인면 오룡리란 곳으로 향했다. 오룡리는 이괄의 난을 피
1. 한 권의 책이 주는 감동얼마 전 우리 문화원 이사이며 공주대학교 교수인 이해준 교수로부터 책 한권을 받았다. 『백제를 꿈꾸며』. ‘우재 안승주 박사 추모문집’이란 부제를 달고 있었다. 더러 이런 종류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공주가 아닌 서울권에서 나온 책이었고 또 예술계 쪽 사람들 책이 주로 많았던 기억이다. 공주란 지역의 인물, 그것도 사학을
오래 전 이야기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어른이다. 아니, 평교사 시절 같은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모시고 근무하던 분이다. 그래서 나는 이분을 지금도 ‘교장선생님’이라 호칭한다. 그러니까 1985년 3월 1일, 나는 공주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공주군(당시는 공주군이었다)의 한 학교로 발령받았다. 마곡사 가는 길목에 위치한 호계초등학교.
1. 인물 박동진 근세사 이후, 우리 공주의 문화계 인물 가운데 인당(忍堂) 박동진(朴東鎭) 선생만큼 무게를 지닌 인물,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또 있을까 싶지 않다. 선생은 이미 공주의 인물이 아니고 한국의 인물이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미수(米壽)의 생애. 세월도 길지만 혈혈단신 이룬 업적도 엄청나다.대개 국악계에서는 기능이 뛰어난 예인에게
50년 전의 은사님 김기평 선생님은 내가 공주사범학교 학생일 때 선생님이셨던 분이다. 국어 과목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1962년도. 벌써 50년 가까운 옛날의 일이다. 지금은 이미 여러 선생님들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뿐더러 공주지역에 살고 계시지 않으니 김기평 선생님은 공주에서 가까이 뵈올 수 있는 유일한 은사님이시다.잠시 선생님의 연보를 살펴보면 선생
우공이란 아호우공. 우공 선생. 공주에 살면서 그동안 여러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어본 이름이다. 이곳저곳에서 우공이란 이름으로 쓰여진 글씨도 여러 차례 본 바 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 우공이란 서예가가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문화원 일로 지난봄에 처음 가까이 만나고 나서 짐짓 놀랬다. 전혀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너
구중회 그 사람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정말로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이라고 생각하며 서슴없이 그 이름을 댈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처지와 생애의 분절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의 공주시대, 그러니까 197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지근거리(至近距離)에 살면서 상호간 영향을 주었던 인물을 찾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구중회란 이
공주 시내를 다니노라면 가끔 한복 차림의 남자 어른들을 만날 때가 있다. 알지 못하는 그 어딘가에 분명 옛 풍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는가보다. 대개 그분들 모습을 보면 예스런 생활을 상당히 고집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더러는 상투차림 그대로이고 백색 두루마기차림일 때도 있고 갓을 쓰고 있을 때도 있다.그러나 이런 조금은 억지스러운 한복차림이
지난 해(2009년) 7월, 내가 공주문화원장의 일을 맡은 이후, 몇 분 고문 선생님을 다시 모신 바 있다. 공주는 문화나 교육으로 볼 때 그 뿌리가 깊고 학문이나 예술의 차원으로 볼 때도 그 볼륨이 만만치 않은 고장이다. 그런 만큼 고문 선생님을 모시더라도 특별하고 공주 사람들이 다 같이 우러러보는 어른을 고문으로 모시고 싶었다. 고심 끝에 모신 분이 연
공주가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과 관계가 깊은 고장이라면 저간의 곡절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공주 사람이라도 그러할 것이다. 일제 침략기 가장 치열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상해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동포가 쏜 총탄에 목숨을 빼앗긴 애국자 김구 선생. 그렇게 암살 당함으로 동포들 가슴속에 지
지난 11월 25일(2009년), 박방룡 국립공주박물관장이 국립중앙박물관 유물부장으로 영전하여 공주를 떠났다. 2007년 11월에 공주에 부임했으니까 대략 만 2년 정도 공주에 머문 셈이다. 그러나 박 관장이 공주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워하는 공주의 인사들이 많았다. 물론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사람이 이처럼 어떤 자리에 있다가 다른 자리로 옮길
공주 시가지를 남북으로 흘러 금강으로 들어가는 개울 이름이 제민천이다. 아마도 이 이름은 『맹자』에 나오는 문구인 ‘제세구민(濟世救民)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오늘날 이 제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상류지역인 금학동에서부터 하류인 금성동 지역에 이르기까지 20여개가 넘는다. 이렇게 많은 제민천 다리 가운데 첫 번째 다리가 제민천교(濟民
우리 문화원에는 두 사람의 여직원이 있다. 20대 중반과 후반의 아가씨들로 김민영 양과 양문숙 양이다.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넘어 희생적으로 문화원의 일을 보는 사람들이다. 늘 이를 고맙게 다행스럽게 여기는 나는 문화원장이 된 이후, 점심시간이면 이들과 식사를 하려고 마음을 쓸 뿐더러 제한된 문화원의 실내공간을 떠나 공주시내의 곳곳을 둘러보고자 노력한다.
하나의 감동으로 실상 나는 무용의 문외한이다. 무용은 그저 연예의 한 가지일 따름, 예술무용까지는 이해가 없는 처지다. 그런데 최선 교수에게 덥석 붙잡히고 말았다. 이유는 감동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난 6월 18일(2009년) 저녁 시간, 공주문예회관 공연장에서 「단청(丹靑)」이란 무용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연이어 공주문화원 테이프
언제부턴가 공주 구시가지 중심부분. 제민천 반죽교 다리 건너편, 공주우체국과 공주문화원 사거리 한 모서리에 한의원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으로 옛날 공주읍사무소 건물(지금의 ‘디자인 카페’)과 공주경찰서(지금의 ‘공주시 청소년 문화 센터’)가 건너다보이는 자리다. 한의원 이름은 ‘연춘당한의원.’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만나는 한의사 선생님은 언
김생연 공주시 산림조합장이 7일 ‘대한민국 신지식경영 대상’ 시상에서 ‘경제인 대상’을 수상했다.시사투데이가 주최·주관하고, 헤럴드경제 신문이 후원하는 ‘대한민국 신지식경영 대상’은 변화와 희망으로 활기찬 사회건설에 앞장서고, 맡은 바 분야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존경받는 신지식인에게 주는 상이다.1976년 9월 산림조합에 입사한 이래 35년간 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