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은 문주왕이 웅진성에 정도(475년)후 삼근·동성·무령왕 등을 거쳐 성왕이 부여로 천도(538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성이다.주위는 약 3km, 동서 800m, 남북 400m 타원형 성지로 현재의 성벽은 임진난 후 1600년 초 관찰사 유근에 의해 축성 됐다. 현재 광복루 밑 동남부 일대에 백제시대 토성(土城)이 남아 있다.현재 성안에는 광복루
조선왕조는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관찰사를 배치했으며, 충청도관찰사는 오늘날의 충청남·북도가 관할 지역이었다.그리고 종2품인 문관이지만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무관직(武官職)도 겸했기 때문에 병권은 물론 경찰권·사법권·징세권(徵稅權)도 아울러 갖고 있어 사실상 한 도내에 있어서 전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최고의 지위이다.거기에다 감영소재지의 목사(牧使)를
계룡산은 신라시대 오악(五嶽)의 하나로 손꼽힌 명산으로 근세에 이르러서도 계룡산사를 두고 관찰사가 헌관이 되어 국가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고종 때에 이르러서는 명성황후의 명으로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봉하여 중악단이 설치되었다고 한다.이 중악단은 현재 신원사 경내에 있으며, 높은 석조기단위
월성산 봉화대··· 삼남지방에서 서울로 통신하던 중요한 곳월성산(일명 봉화대)은 공주 시가지 중심부에서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두리봉(일명 망월산·312m), 주미산(381m)과 함께 공주시를 커다란 배의 형상으로 둘러싸고 있다.월성산 정상부에는 조선시대에 서울과 남부지역을 연락하던 봉수대가 있다. 따라서 지역민들은 ‘봉화대’로 부르기도 한다.조선시대에
“공(公)은 유성 학하리 출생이며 만년에 공주읍 교동에서 거주하였다.”공주의 역사서 ‘공산지’의 공신조(功臣條)에 어사 박문수의 이 같은 기록이 있다. 어사 박문수가 공주에서 말년을 보냈기 때문에 공산지에 이름이 오른 것이다.공산지에는 정사(正史)를 인용해 ‘박문수는 영조 술신(1728년) 박필몽(朴弼夢), 이인좌(李麟佐) 등이 청주에서 거병해 병사 이봉상
우금티 전적지(국가사적 제387호·공주시 금학동)는 제2차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최대 격전지로 동학농민군의 원혼이 서려있는 곳이다.1894년 2월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 등이 탐관오리의 학정과 부패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보국안민(保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했다.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은 후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비선거리는 ‘비(碑)를 세운거리 혹은 비(碑)가 서있는 거리’의 준 말이다.현 공주대교 옆에서 강 건너 느티나무 거목이 서 있는 맞은편 언덕(현재 금강 홍수통제소 앞)까지의 도선장(渡船場)을 ‘장깃대 나루’라 부르고, 현 금강 홍수통제소 앞에서 공주대 인사대 앞까지를 ‘비선거리’라 했다.그런데 이 ‘비선거리’야 말로 전라도 지방으로 통하는 서민들의 대로였다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의 신원사(新元寺)에서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다보면 보광암 갈림길에 이른다.여기서 왼쪽 보광암 길로 들어서 계곡길을 계속 오르다 보면 산죽밭에 이어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융(隆)과 얽힌 전설이 전하는 고왕암(古王庵)이 나온다.앞은 키를 넘는 대나무로 둘러싸이고, 법당 뒤는 절벽이 치솟아 있는 고왕암은 정숙하면서도 정갈한 산사의
공주 근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꼽으라면 창벽을 빼 놓을 수 없다.대전 방면으로 강변길을 따라 8km쯤 가다 보면 ‘말어구(馬於口)’ 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사방의 산세가 어느 곳보다도 가파르다. 그도 그럴 것이 계룡산의 지맥이 동북으로 달리다가 금강에 가로 막혀 우뚝 솟아 오른 봉우리, 그것이 국사봉(國賜峰·392m)이다.이 국사봉을 축으로 하여 서쪽
280년 전 충남·북을 방위하기 위해 설치된 5개의 진(鎭. 전진-홍주, 후진-충주, 좌진-해미, 우진-공주, 중진-청주)이 있었다.당시의 공주 우진은 지금의 (구)엽연초생산조합 뒤 일대에 위치했었으며, 지금의 공주지역방위사령부라 할 수 있다. 특히 공주진의 관할은 지금의 은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지난 2005년 8월 20일, 공주시 옥룡동 303번지 0
수원사지는 공주시 옥룡동 월성산(月城山)에서 서북쪽 수원골에 위치한 절터로 오랫동안 백제시대의 사지(寺址)로 인정되어 오던 곳이다.면적은 7,219㎡이며, 탑지(塔址)는 사각형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기준으로 한 변의 길이가 3m이다. 주춧돌의 일부와 기와조각, 납석제 소탑(蠟石製小塔), 석불두(石佛頭) 등의 유물이 발굴됐다.수원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문회당은 공주시 정안면 운궁리에 소재 했던 옛 서당(書堂)의 이름이다.문회당(文會堂) 기문은 도암(陶菴) 이재(李縡·1680~1746)가 지었고, 글씨는 그의 제자 홍계희가 1750년 충청 감사로 재임 중에 썼다.기문을 통하여 운영의 실태를 살펴본다면,가장 융성했던 시절은 숙종 (정묘·1687년)부터 약 60여 년간인데 그동안 세태의 변화에 따라 많은 우여
대통사지는 공주시 반죽동에 위치하고 있는 평지가람이다.대통사지에 대해 ‘삼국유사’ 권3 신라 법흥왕 때의 불교 융성에 대해 언급한 기사에 ‘대통원년(大通元年) 정미(丁未)에 양제(梁帝)를 위해 웅천주에 사찰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 불렀다’고 나와 있다.웅천은 공주, 대통은 남조 양(梁)의 년호, 대통원년(大通元年) 정미(丁未)는 527년이며 백
옥룡동 대로변 신진가든 예식장이 자리하고 있는 골짜기를 ‘보통골’이라고 한다. 그 까닭은 옛날 이곳에 ‘보통원(普通院)’이 있었기 때문에 얻게 된 이름이다.원(院)제도는 고려조에서 조선조까지 이어져 왔으며, 주로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나 공용(公用)으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각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했었다.기록에 보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 가운데 공주 고마나루가 4대강 사업으로 훼손,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윤여헌 공주향토문화연구회 명예회장은 “고마나루는 곰의 전설이 서린 곳으로 백제의 건국신화로 연결되는 신성시해야 할 곳인데 보를 설치함으로써 변형이 많이 됐다”며 안타까워 했다.고마나루(또는 곰나루)는 공주시 웅진동 무령왕릉 서쪽에 있는
공주가 대구와 함께 1년에 두 차례 약령대시(藥令大市)가 열려 성황을 이뤘음을 전해 주는 기록이 있다.약령시는 일정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열린 한약재 시장으로, 서울의 ‘경동시장’이나 대구의 약령시라면 몰라도 ‘공주약령시’라고 하면 대단히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기록에 보면 공주는 대구와 함께 1년에 두 차례 ‘약령대시’가 열려 성황을 이뤘음을 전해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북쪽에 있는 취리산은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신라 문무왕 5년(665)에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입회하에 백제의 왕자로 웅진도독에 임명됐던 부여 융과 신라 문무왕간의 동맹서약을 했던 곳으로 전해진다.‘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한지 5년이 되는 665년 공주 취리산에서 백제와 신라의 회맹(會盟)이 이뤄졌다는 내용이 있다.이미
정지산백제유적은 공주시 금성동 무령왕릉이 자리한 구릉의 북쪽자락 금강에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공산성이 마주하고 있다.이 정지산유적은 백제가 웅진에 도읍했던 시기의 국가제사 시설로, 특히 왕이나 왕비의 가매장을 위한 빈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이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 의하면, 왕과 왕비는 27개월간 빈전(殯殿)에 모셔져 있다가 현재의 왕릉에
고마나루 남쪽 강변일대를 ‘정방뜰’ 또는 ‘소정평(蘇定坪)’으로 부르는데, ‘소정’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이곳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웅진성을 공략하기 위해 부여에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머물렀던 곳이다.660년 백제가 망한 후 당은 백제의 옛 땅을 나눠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파천 또는 몽진(蒙塵)이라는 말이 있다.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임금이 도성(서울)을 버린다는 것은 자연인의 불행은 말 할 것도 없지만, 한 나라의 중심이 흔들린다는 그 상징적 의미는 무엇으로도 견줄 바 아니다.역사에서 보면 외침과 내란 등으로 임금이 도성을 떠난 경우는 적지 않다. 임진왜란에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했던 일,